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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는 미스(Ms)김

그냥 미스 김 아니고, 미국사는 미스김 (Ms. Kim) - 미국 호칭

by 미영이 오빠 2024. 4. 22.

미국 사는 미스 김 이야기-1

Ms.Kim은 미국에서의 나의 호칭이다.

한국에서 나의 커리어와 주부로서 ,토종 한국인으로 살던 나에게 타의적인 이유로 미국에 올 이유가 있었고 내 선택은 호기롭게 '까짓껏 해보는 거다'였다. 지금생각해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가 딱 맞는 표현이다.

미국인들은 내가 결혼 한 후 돌싱인지, 남편이랑 살고 있는 여자인지 결혼 여부를 모르기 때문에 통틀어 미스 김(Ms.라스트 네임, It's not possile to know if the woman is married or single.)으로 부른다.

미국에서 최,최,최,초로 듣게 된 내 호칭은 낯선 맴(Ma'am) 우리말로 부인/사모님 이었다.

1. 나쁜 기억, 내가 부인/사모님인 맴(Ma'am)의 호칭에 부정적인 기억을 남긴 그날은 두 백인 남자 때문: 

미국에 와 렌트집 계약날이 내가 도착한 날과 한달 정도 차이가 났고 부득이하게 그 한달 정도 지역 어느 호텔에서 지냈다. 그리고 이사간 미국집은 전형적인 현대식 싱글 미국집(단독주택)이었고 ,이런 싱글 하우스들이 큰 마을을 이루어 HOA가 엄격히 있는 나름 우리 도시에서 강남(?)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우리끼리 강남이라 부르게 된 몇 가지 이유는 마을 내 이웃이 거의 백인 중상층이고, 자녀들이 학군(초,중,고) 좋은 곳에 배정될 수 있고, YMCA나 마트가 가까워 생활이 편리한 곳이다. 이는 주관적인 견해가 아니라 미국인들 역시 집을 고르는 기준이 되고 선호하며 실제 이  조건들을 반영하여 집을 찾고 이사를 한다. (부동산 온라인 웹사이트나 앱에서도 마켓에 내놓은 주택을 설명하는 기준이 된다.)

그때는 미국에서의 첫번째 우리집이 우리 도시에서 좋은 위치인지, 집이 어느 수준인지, 이웃은 어떤지, 학교는 가까운지 그런 궁금증과 의지의 반영은 없었고  업무상 나보다 먼저 미국에 도착했던 남편이 계약을 해 둔 것 집이었다. 그러면 그 집은 남편의 계산된 의도냐면 그것도 아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이 동네가 좋다고 들어 와 봤는데 딱 두 집 뿐인 상황에서 선택(?)을 한 것이 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동네가 좋다는것은 알아서...

 

실제 난 이 동네에서 5년 정도 살았는데 그 중 약 3년을 매일 같이 산책을 했다. 처음에는 낯선 곳에서 아프지 않을려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 였다가 나중에는 미국의 하늘, 지저기는 새, 동네 산책하는 이웃들과 개 등 내 주변의 아름다운 사물과 사람을 보는게 좋아 걷는게 즐거웠다.

 

우리 도시는 미국에서도 몇 안되는 큰 미국 부대가 있는데 그들의 이동 시기가 있는데 대부분 이동 시기와 미국인들의 여름방학(5월~8월 초)시기가 맞물려있다.

그래서 우리가 도착한 12월에는 렌트집이 눈을 딱고도 없는 이유였다.

싱글 하우스는 1 키친, 큰 다이빙룸,  댄스를 춰도 될 만한 리빙 룸(거실, Livig room) , 운동장 만큼 넓은 마스트 룸(한국식으로 안방 정도), 2 방 만한 화장실,  2 작은 방, 차 두대가 들어갈 Garage, 앞 야드(앞 마당), 뒷 야드(뒷 마당), 12개의 나무 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 전에 살던 사람이 이사 나간 후,  부동산 사무실에서 청소도 해두고 카펫 버그약도 쳐 놓고 잔디고 깍아 두고 했지만 실제 들어가 보면 새 집이 아닌 이상 몇 가지 고장이 나 있다. 또 살다보면 고장이 나기도 한다.

이사를 해보니 마스터 룸(안방)화장실에 캐비넷( 물건 수납 서랍?) 문이 고정이 안돼 있었다.

나는 무서운 영어를 겨우 극복하고 부동산 사무실의 메일로 고쳐줄 것을 건의했고 며칠 뒤 젊은 백인 남자 둘이 우리집을 방문했다.

잘생긴 백인 남자 중 더 잘 생긴 남자가 도구로 이리 쑤시고 저리 쑤시더니 'Ma'am ~The things is I don't have any parts now I'll get the parts and be back soon' 부품이 없으니  부품을 구해서 곧 방문 하겠다고 했다. 미국에 온지 며칠 안된 날이었기 때문에 내가 특별히 외출할 일도 없었지만 그날 잘생긴 그들을 종일 기다렸다.

그들을 덕분에 내 평생 잘 알지도 못한 남자를 그렇게 오래, 하염없이 기다려 본 적이 처음이었다.

 

서랍을 열어 두고 그들이 하도 안와 부동산에 메일을 다시 보내고 40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부품을 들고 와 고쳐주고 갔다.

미국은 사실 일 처리가 늦은 것은 맞다.

하지만 몇년이 지난 지금 다시 떠올려 보면 그 일은 비정상적인 뭔가 오류가 있어 늦어도 너무 늦은 일 처리였다.

하여간 미국에서 내가 최초의 호칭은 사모님, 부인 (Ma'am)이었고 처음 들었을 때는 'Men?'이라 불렀나 놀라기도 했다. 그건 영어를 잘 못듣는 막귀인 나에게 신기한 호칭 이었다.

잘생긴 젊은 남자가  나에게 불렀던 호칭이 그날 이후 왠지 그냥 싫었다.

2. 좋은 기억,  미국에서 처음 미스김 (Ms.Kim)이 된 날:

아이가 하이스쿨 학교 축구대표가 되면서 같은 주(state)안 가까운 도시에 시합을 하러 다녔다.

학국과 달리 미국 학부모는 자녀의 경기를 지원하기 위한 일환으로 부모들도 함께 참여한다.

부모님 외에도 할머니, 할아버지, 심지어 사촌 들도 총 출동하는 데 우리집은 대명천지에 우리 가족 딸랑 3명에 남편은 주재원으로 몸과 영혼을 깔아서 회사에 충성을 다하니 나혼자 아이에게 힘을 주기 위해 함께 다녔다.

우리팀 코치님은 30대 초반의 젊은 백인이었는데 한국으로 따지면 한국전력(?)같은 공기업에 다니면서 페이를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자원봉사같은 수준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는 분이셨다.

잘생겼고 똑똑하고 스윗한 젊은 코치님이 나를 부를 때 늘 나는 Ms.Kim이었다. (의미 부여?)

 

나는 한국에서 직장에서는 김땡땡이었고 동네에서는 아이의 엄마로 불리었다.

그 백인 코치가 내가 아이를 혼자 따라다니는 부모이다 보니 돌싱녀 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남편이 있는 여자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미국에서 처음으로 미스(Ms.)김으로 살게 되었다.

나쁘지 않은 호칭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미스는 결혼을 안한 아가씨를 부르는 호칭이니까... 만약 내가 예전처럼 싱글이었고 젊은 아가씨였다면(single woman) 'Miss Kim'(Ms.와 스펠링이 다름)이었을 것이다.

젊었을때도 한번도 불리지 않았던 미스 김으로 나는 지금도 미국에서 살고 있다.

많은 시간이 소비의 시간이 되지 않고 투자의 시간이 되어 빛을 발하기를 바라며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다.

가끔은 없어져 버린 한국의 시간에 조바심도 나고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물질적인 성공면에서 나는 더 나을 수도 있었겠는데...라는 하지도 않은 성공이라는 가상을 두고 아쉬워할 때도 있지만  미국안에 살고 있는 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음 시간에 계속